글로벌 위기 때마다 엔高에 운다… '외화 富國' 일본의 속앓이
글로벌 위기 때마다 엔高에 운다… '외화 富國' 일본의 속앓이
  • 엔디소프트(주)
  • 승인 2016.06.29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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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조차 되지 않는다."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가 결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난 24일 일본의 산업용 센서 제조업체인 오프텍스(OPTEX)의 히가시 아키라 이사는 "현재로선 향후 유럽 정세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체 매출의 3분의 1이 유럽에서 나오는 이 회사는 브렉시트로 더 이상 엔저 효과를 보기 어려워졌다.

영국이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하겠다는 브렉시트 결과가 나오자 정작 울상이 된 나라는 일본이었다. 엔화 환율이 2년 7개월 만에 처음으로 장중에 달러당 100엔 아래로 떨어지고(엔화 가치 상승), 엔고(高)로 수출 경쟁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한 증시에선 주가가 8% 가까이 폭락했다. 2012년 말 집권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4년간 200조엔을 풀어 떨어뜨린 엔화 가치가 4시간 만에 제자리로 돌아갔다는 말까지 나왔다. 2008년 9월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으로 미국발(發) 금융 위기가 닥쳤을 때도 엔화 환율은 초강세를 보여 달러당 100엔대에서 80엔대로 급락했다.

한국은 위기가 오면 환율이 오르는 통에(원화 가치 하락) 경기 회복에는 도움이 된다. 하지만 위기 때마다 글로벌 시장에서 엔화의 인기가 치솟는 바람에 정작 일본 경제는 동네북처럼 '엔고'로 두드려 맞아 경기 회복이 늦어진다. 시장이 요동치면 글로벌 투자자들이 엔화를 피난처로 삼는 게 일본의 경기 회복엔 '독(毒)'이 되는 것이다.

빚더미 일본의 엔화가 안전 자산?

언뜻 보기엔 엔화가 '안전 자산'이라는 말은 믿기 어렵다. 일본은 1990년대 이후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불리는 불황기를 겪고 있다. 경기 부양을 위해 재정을 펑펑 쓰다 보니 국가 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250%에 육박한다. 작년 9월 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가 일본의 국가 신용등급을 A+로 한 단계 강등했을 정도다.

그러나 위기 때 잠시 대피할 목적으로 엔화를 사는 글로벌 투자자들은 일본 정부 빚만 보고 엔화를 평가하지는 않는다. 일본은 1991년 이후 25년 동안 세계 1위의 대외 순 채권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빚더미 위에 앉아 있을지 몰라도, 일본 기업과 가계는 그동안 수출로 벌어들인 돈을 해외에 엄청나게 빌려주고 투자해 놓고 있다. 작년 말 현재 일본의 순 대외 채권액(대외 채권에서 채무를 뺀 것)은 339조엔(당시 환율로 약 2조8200억달러)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다. 2위 독일(1조6200억달러), 3위 중국(1조6000억달러)의 1.5배가 넘는다. 위기 때 비상금인 외환보유액도 지난 4월 현재 1조2625억달러를 갖고 있어 중국에 이어 세계 2위 보유국이다. 외환보유액의 원천이 되는 경상수지는 1981년 이후 줄곧 흑자다. 작년 일본의 경상수지 흑자는 16조4120억엔으로 전년(3조8800억엔)보다 4배 증가했다.

엔화는 3대 국제통화로 24시간 거래

게다가 엔화는 국제 외환시장에서 미국 달러(2013년 거래 비중 43.5%), 유로(16.7%)에 이어 셋째(11.5%)로 많이 거래된다. 24시간 거래되는 시장도 있다. 엔화를 샀다가 위기 때 돈이 묶일 염려가 없다.

또 일본의 금리가 낮아 속칭 '와타나베 부인'이라고 불리는 일본의 개인 투자자 등은 엔화로 빌려 해외에 투자하는 '캐리 트레이드'를 많이 한다. 일본이 불황이라 계속해서 초저금리를 유지하기 때문에 가능한 거래다. 그런데 국제 금융시장에 위기가 오면 이들이 해외 투자금을 회수해서 엔화로 다시 바꾸느라 엔화 수요가 늘기도 한다. 이렇듯 엔화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보고, 다른 글로벌 투자자들도 시장이 출렁일 때마다 관성적으로 엔화를 찾는 것이다. 이윤석 금융연구원 국제금융연구실장은 "한국 시장은 글로벌 시장이 호황일 때 외국인 투자자들이 투자했다가 위기 때만 되면 돈을 찾아가는 '현금 인출기' 역할을 하는데, 엔화는 정반대"라고 말했다.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이 24일(현지시각)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와 관련해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세계 경제, 금융·외환시장에 주는 리스크를 매우 우려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아소 재무상은 이날 달러당 엔화가 2년 7개월 만에 100엔대가 깨지는 등 엔화가 초강세를 보인 데 대해 "필요한 때에는 확실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AP 연합뉴스
브렉시트발(發) 엔고 막으려 안간힘

'아베노믹스'로 엔저를 추구해 저성장에서 탈출하려는 일본으로서는 브렉시트가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아소 다로(麻生太郞) 일본 부총리는 지난 24일 달러당 100엔이 붕괴하자 "필요할 때는 확실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시장에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일본 정부는 10조엔 이상을 투입하는 추가경정예산을 검토하고 있고, 일본은행은 다음 달 열리는 통화정책회의에서 추가 양적 완화 조치 등을 결정해 엔화를 더 풀어 엔화 가치를 떨어뜨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엔저가 다시 오려면 글로벌 경제가 순항을 하거나, '안전 자산'으로서 엔화의 위상이 떨어져야 하는데, 브렉시트로 글로벌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진 지금 상황에선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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